[싱가포르] 안중근의사, 이토 저격 당시 상황 상세 묘사한 싱가포르 신문 발견돼…새로운 사실 드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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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인회 작성일14-03-25 10:11조회6,4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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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순국 104주기(3월 26일)를 하루 앞둔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저격 전 30분간 러시아 재무장관과 이야기를 나눈 등 저격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한 기사가 발견됐다.
25일 뉴시스는 1909년 11월 18일 발행된 싱가포르 프리프레스(The Singapore Free Press and Mercantile Advertiser)를 인용해 ‘이토 백작 피살 상보’라는 제목의 기사 내용을 전했다.
당초 이토는 러시아의 재무장관 코콥초프를 만나기 위해 플랫폼을 걸어가다 저격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도에 따르면 이토는 1909년 10월 26일 장춘에서 기차를 타고 오전 9시경 하얼빈역에 도착해 열차 안에 들어가 코콥초프 러시아 재무장관과 30분간 대화했다.
이토는 대화를 마친 뒤 열차 앞에서 기다리던 러시아와 중국 영사 등의 영접과 군인들을 사열을 받았고 양 옆에는 코콥초프와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가 서 있었다. 일본 남만주철도 사장 나카무라 요시히코(中村是公)와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森泰二郞) 등 수행원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이토가 일본인 환영단 앞에 도착했을 때 회색 양복 차림을 하고 사냥 모자(shooting cap)를 쓴 23세의 한국인이 튀어나왔다. 그는 7연발 리볼버 권총으로 불과 5피트(약 1.5m) 앞에서 이토의 가슴과 복부를 겨냥해 3발을 쏘았다.
곁에 있던 나카무라 사장은 쓰러지는 이토를 잡았고 이토는 “내가 당했어”라고 신음을 토했다. 차츰 안색이 창백해진 이토는 급히 열차안으로 후송됐고 그곳에서 “누가 쐈나? 모리(비서관)도 맞았나?”하고 물었다고 전했다. 이토는 30분 뒤인 10시쯤 숨졌다. 결정적 사인은 오른쪽 폐를 관통한 총알 때문이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쏜 뒤 세발을 더 발사해 옆에 있던 가와카미 총영사의 오른 팔을 맞췄고 남만주철도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이사의 오른쪽 발을 모리 비서관의 오른 팔을 맞춘 것으로 밝혀졌다.
당일 싱가포르 프리프레스 기사는 “저격자는 현장에서 붙잡힌 후 전날 오후 7시에 겐산과 블라디보스톡을 경유해 하얼빈에 들어왔으며 ‘이곳에 온 목적은 수많은 한국인들을 살해한 이토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며 “그는 체포직후 아주 평온한 모습이었으며 두려움의 빛이 전혀 없었고 더 이상의 말을 하기를 거부했다”고 당시 안중근 의사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뉴시스에 따르면 싱가포르 프리프레스 외에도 당시 싱가포르 영자신문들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관한 속보를 지속적으로 보도했다. 저격 다음날인 10월 27일 스트레이츠 타임스는 로이터 송고기사를 통해 이토 저격 사실을 전했고 11월 10일엔 “30대로 알려진 한국인 저격자는 양복 차림이었으며 저격 직후 ‘한국이여 영원하라’고 외쳤다”고 보도했다.
25일 뉴시스는 1909년 11월 18일 발행된 싱가포르 프리프레스(The Singapore Free Press and Mercantile Advertiser)를 인용해 ‘이토 백작 피살 상보’라는 제목의 기사 내용을 전했다.
당초 이토는 러시아의 재무장관 코콥초프를 만나기 위해 플랫폼을 걸어가다 저격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도에 따르면 이토는 1909년 10월 26일 장춘에서 기차를 타고 오전 9시경 하얼빈역에 도착해 열차 안에 들어가 코콥초프 러시아 재무장관과 30분간 대화했다.
이토는 대화를 마친 뒤 열차 앞에서 기다리던 러시아와 중국 영사 등의 영접과 군인들을 사열을 받았고 양 옆에는 코콥초프와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가 서 있었다. 일본 남만주철도 사장 나카무라 요시히코(中村是公)와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森泰二郞) 등 수행원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이토가 일본인 환영단 앞에 도착했을 때 회색 양복 차림을 하고 사냥 모자(shooting cap)를 쓴 23세의 한국인이 튀어나왔다. 그는 7연발 리볼버 권총으로 불과 5피트(약 1.5m) 앞에서 이토의 가슴과 복부를 겨냥해 3발을 쏘았다.
곁에 있던 나카무라 사장은 쓰러지는 이토를 잡았고 이토는 “내가 당했어”라고 신음을 토했다. 차츰 안색이 창백해진 이토는 급히 열차안으로 후송됐고 그곳에서 “누가 쐈나? 모리(비서관)도 맞았나?”하고 물었다고 전했다. 이토는 30분 뒤인 10시쯤 숨졌다. 결정적 사인은 오른쪽 폐를 관통한 총알 때문이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쏜 뒤 세발을 더 발사해 옆에 있던 가와카미 총영사의 오른 팔을 맞췄고 남만주철도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이사의 오른쪽 발을 모리 비서관의 오른 팔을 맞춘 것으로 밝혀졌다.
당일 싱가포르 프리프레스 기사는 “저격자는 현장에서 붙잡힌 후 전날 오후 7시에 겐산과 블라디보스톡을 경유해 하얼빈에 들어왔으며 ‘이곳에 온 목적은 수많은 한국인들을 살해한 이토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며 “그는 체포직후 아주 평온한 모습이었으며 두려움의 빛이 전혀 없었고 더 이상의 말을 하기를 거부했다”고 당시 안중근 의사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뉴시스에 따르면 싱가포르 프리프레스 외에도 당시 싱가포르 영자신문들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관한 속보를 지속적으로 보도했다. 저격 다음날인 10월 27일 스트레이츠 타임스는 로이터 송고기사를 통해 이토 저격 사실을 전했고 11월 10일엔 “30대로 알려진 한국인 저격자는 양복 차림이었으며 저격 직후 ‘한국이여 영원하라’고 외쳤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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